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틴 루터 킹 (문단 편집) == 평가 ==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인지도와 평가도 높고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미국 내 흑인들의 인권 향상의 역사는 이 사람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공존과 통합, 모든 인종의 평등을 주장하는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적 가치의 실현을 부르짖은 점과 그 수단으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비폭력 인권 운동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점이 킹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이상론만 설파하고 다니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인권 운동을 이끎으로서 연방 대법원의 흑인/백인 버스 좌석 차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낸 사건에도 으뜸가는 활약을 펼치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등 현실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인종차별 폐지 관련 운동 외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키지 말라면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종차별 외 다른 인권문제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행적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킹은 [[개신교]] [[침례회]] 목사였으므로 자연히 그의 행적은 [[개신교]] 사상에 뿌리를 둔다. 특히 킹이 비폭력 운동과 흑백 통합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다닌 것에는 성경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킹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큰 특징은 '''비폭력'''인데 사실 처음부터 비폭력을 밀고 나간 것은 아니다. 물론 폭력을 용인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킹을 노리는 세력과 협박도 많고 해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구비해 두었고, 폭력에 대단히 부정적이긴 했지만 자기 방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폭력적 수단의 동원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 커뮤니티 내에서 백인 반전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한 확신이 생겨나게 되었고 자기방어와 개인 무기 소지를 등진 채 비폭력 인권운동의 틀을 다지게 되었고, 그의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비폭력 운동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말콤 엑스와 가장 큰 대비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비폭력 운동이라는 수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이름으로 킹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반면 엑스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킹의 핵심 주장이자 그의 사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분은 '흑인과 백인, 둘은 어느 하나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 평등하며 따라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였지만 급진적 성향의 엑스는 킹이 백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며 그의 인권운동을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엑스 외의 과격파 흑인들 역시 킹의 온건적 인권운동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여론과 별개로 당시 흑인들 사이에서 킹의 사상이 더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흑인들이 킹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며 그에게 동조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또한 말년에는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서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아이러니한 대비로, 비폭력 운동의 마틴 루터 킹과 폭력적인 말콤 엑스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작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든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수감 생활을 여러번 하는 고초를 겪은데 반해 말콤 엑스는 단 한 번도 투옥 혹은 체포된 적이 없었다. 비폭력 운동과 인종 평등의 가치 주장 및 흑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공로로 1964년 10월 14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당시 FBI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가 분노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킹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FBI]]에서는 그의 약점을 캐내다가[* FBI의 흑역사를 다루는 작품에는 항상 나오는 이야기다. SBS에서 더빙 방연한 후버 관련 전기 영화에서는 후버와 부하들의 대사로 킹 목사의 신음소리 언급이 나온다. KBS에서 방영한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외화에서 느글느글한 원로 FBI 요원이 자기가 회의를 느꼈을 때가 킹 목사 침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때라고 할 정도였다.] 난잡한 성생활에 관한 증거를 발견했다. 이에 관해 킹 목사의 친구였던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는 그의 자서전에서 킹 목사가 여자에 약하다고 했지만 후에 이것이 외설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것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인생을 저술했던 데이비드 개로(David Garrow)는 킹이 매일 만나는 여자들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들과의 섹스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FBI는 이것을 이용해 킹에게 민권운동을 멈추라는 익명의 협박 편지까지 보냈다. 그 때문에 킹은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았다. FBI는 신문기자들에게 킹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대해 폭로하는 기사를 내라고 했지만 모든 신문기자들이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후버야말로 치졸하게 남의 약점이나 캔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한다. 킹의 위상이 워낙에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FBI가 캐낸 이 정보는 명백히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협박과 도청 등의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은 둘째치고, 목적부터가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킹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였으므로 이를 좋게 본 기자는 없었다. 킹의 여자 관계가 개인적인 흠결은 될 수 있을지언정 법적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킹 목사의 사생활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그것과는 별개로 FBI의 불법 행위는 마찬가지로 크게 비판한다. 결국 이 정보는 극비에 부치고 National Archives에 2027년까지 보관해 두기로 했다.[* 마틴 루터 킹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케네디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치부들은 대부분 2027년을 한도로 해서 아카이브에 넣었다.] 그 외 1990년 시어도어 파파스라는 연구자가 킹이 자신이 가르친 학생의 논문을 표절하여 박사논문 3분의 1 이상을 베꼈다는 사실[* 심지어 그 학생이 실수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베꼈다.]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연설의 감동적인 결말 부분 역시 아치볼드 케어리라는 흑인 목사가 1950년대에 한 연설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다만, 케어리 목사의 연설 역시 기존에 있었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 즉 그의 유명한 인권 연설[* 다만 논문과 달리 연설은 일부 문구를 설령 다른 곳에서 따왔다고 한들 비난받을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과 논문 다수는 상당 부분을 표절한 셈인데, 다만 [[표절]]이라는 명백한 결론이 난 상태는 아니고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독창적인 논문이나 저술도 아니고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한 연설이라면 최대한 감명깊은 표현을 어디서라도 끌어와서 쓰는 것이 당연하다. 연설인 만큼 주석을 달아서 출처를 밝힐 수도 없고 이것을 표절과 동일시 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이는 킹 목사가 위대한 연설가는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지만, 위대한 운동가였다는 평가에 흠이 있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서나 관련 증빙자료들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주로 FBI 관련 인사들의 폭로에 의해 드러났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마틴 루터 킹의 여성 편력과 관련해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폭로가 되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상과 더불어 FBI의 불법사찰에 대한 당시 관계자들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우려, 그의 사생활을 기록한 방대한 도청기록은 현재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고 있으며, 이 1급 비밀문서들은 2027년까지 공개가 금지가 되어 그 이후에 공개될 예정이다. 물론 킹 목사의 잘못된 행동이 그것이 그의 공적을 깎아내릴 근거는 되지 못한다. 마하트마 간디 등도 현재 여러 행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잘못된 행동들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간디와 테레사의 인류애적 헌신과 자기희생적 봉사의 업적 및 공적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킹 목사는 흑인들의 인권과 [[인종차별]] 철폐라는 인류애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으며 모든 흑인들의 영웅이었다. 인도인에게 간디가 지금의 인도를 있게 한 인물인 것처럼 킹 목사 역시 흑인들에게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 간 흑인 인권 운동의 아이콘이다. 그의 잘못된 행동은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인종차별 철페 및 인종간 평등에 대한 교훈은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며 그는 미개한 취급을 받던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다 삶을 마감한 위인이었다. 그의 잘못된 행적 몇 가지로 그의 모든 철학과 공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며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그의 교훈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배워야할 중요한 가치다. 현재 킹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Martin Luther King, Jr. Day)"을 통해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려지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데이는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킹의 생일 즈음으로 설정해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이름 그대로 마틴 루터 킹을 기리기 위한 날로 처음 공휴일 지정된 1986년에는 기념일 며칠전 레이건 대통령이 킹 목사의 미망인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있었다. 개인의 탄생일이 국가 공휴일이 된 것은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이며 일반인의 생일이 공휴일이 된 것으로는 최초라고 한다. [[미국]] [[성공회]]에서는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4월 4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